봉화 축서사(鷲棲寺)
person 김종규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8-07-09 14:38
6월 16일 닭실마을을 빠져나온 후 향한 곳이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에 있는 문수산(文殊山) 축서사(鷲棲寺)다. 처음 가보는 곳일 뿐만 아니라 이름도 처음 듣는 곳이다. 닭실마을에서 봉화 쪽으로 나오다 물야 쪽으로 조금 달리면 축서사란 안내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그 곳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산을 오르는 가파른 길이 나온다. 이 정도 경사라면 기어를 2단 정도로 내리고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이 길을 한참 올라가면 8~9부 능선쯤 되는 곳에 축서사가 있다. 절에서 바라보면 많은 산봉우리들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부석사의 그것 못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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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서사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 |
축서사는 신라 문무왕13년(673)에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보다 3년 앞서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또 의상이다. 그 시절 이 땅에 지어진 유명한 사찰 중에 의상이 창건하지 않은 절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의상이 직접 창건했다기 보다는 아마도 의상의 이름을 빌려 지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야 불사가 잘 될 것이고, 절의 권위도 높아질 터이니. 의상은 관계를 했다면 재가만 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전국의 절집을 자신의 이름으로 짓도록 하려면 결재만 하는데도 꽤나 바빴을 것 같다.
어쨌거나 절의 창건 유래는 의상대사가 인근 지림사에서 묵던 중 창문으로 야광이 비쳐 나가보니 현재의 절 자리에 비로자나불로 인해 서광이 비치니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축서사로 명명하였다 한다.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절은 비로자나불과 관계가 깊은 절이다. 비로자나불(Vairocana)은 화엄경(華嚴經)의 주불로 알려져 있다. 빛에 비유되는 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불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비로자나불을 보거나 들을 때마다 그리이스의 이데아와의 상관관계가 자꾸 떠오른다.
안내하는 분이 비로자나불이 있는 건물에는 빛 광(光)자가 들어간다고 한다. 보광전, 대광보전 등. 이 절의 비로자나불은 보광전에 있다. 안내하는 분은 후에 불상의 수인도 그렇고 불상이 있는 건물도 그렇고 혼선이 생겨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이 절은 원칙이 잘 지켜져서 빛 광자가 들어간 건물에 비로자나불이 있고 수인도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지권인은 두 손을 가슴에 붙이고 왼 손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으로 감싸서 오른손 엄지가 왼손 검지 끝에 닿도록 하는 손의 형태로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원래는 하나라는 뜻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절의 비로자나불과 광배는 보물 99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광배(光背)가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돌로 만든 광배는 윗부분만 남아있다고 한다.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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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전의 비로자나불. 좌대도 오래된 것인데 가려져 있다. |
안내하는 분이 비로자나불이 있는 건물에는 빛 광(光)자가 들어간다고 한다. 보광전, 대광보전 등. 이 절의 비로자나불은 보광전에 있다. 안내하는 분은 후에 불상의 수인도 그렇고 불상이 있는 건물도 그렇고 혼선이 생겨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이 절은 원칙이 잘 지켜져서 빛 광자가 들어간 건물에 비로자나불이 있고 수인도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지권인은 두 손을 가슴에 붙이고 왼 손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으로 감싸서 오른손 엄지가 왼손 검지 끝에 닿도록 하는 손의 형태로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원래는 하나라는 뜻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절의 비로자나불과 광배는 보물 99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광배(光背)가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돌로 만든 광배는 윗부분만 남아있다고 한다.
축서사(鷲棲寺)는 일반적인 한자음으로는 취서사로 읽지만 ‘鷲’자를 불교식으로 읽으면 ‘축’이 되어 축서사로 부르는 모양이다. 축서사는 뜻 그대로 풀이하면 독수리가 사는 산이란 뜻이 되지만 불교 설화에 등장하는 신령한 산의 이름이다. 축서산(鷲棲山) 혹은 영축산(靈鷲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우리나라의 유명한 절 통도사가 있는 산 이름이 영축산이다. 이 산은 영축산, 영취산, 축서산, 취서산 등으로 부르다 최근에 영축산으로 부르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축서사는 원래 퇴락했던 절인 모양인데 현재는 큰 절이 되어있고 신도들도 많이 찾고 있었다. 이 정도의 불사를 하려면 엄청난 재원이 필요할 것이 자명한데 봉화군 인근의 신도들 시주로는 어림도 없어 보인다. 동행한 분 중들 중 누군가가 서울의 이름 있는 스님이 이곳에 내려오면서 절이 많이 커졌다고 알려준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무여(無如) 스님이란 분이다. 현재 축서사의 선원장인 무여 스님은 1940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 ‘남의 집 머슴살이 같은’ 속세의 생활을 떨치고 오대산 상원사에서 희섭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상원사, 동화사, 송광사, 해인사, 관음사, 칠불사, 망월사 등 전국 선원에서 40여 년 동안 수선안거 했다. 1987년 이후 봉화 축서사에서 주석하고 있다.
시대마다 그 시대를 나타내는 사찰의 건축 양식이 있다. 그래서 전문가는 건물 모양만 봐도 어느 시대에 지어진 절인지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절들이 지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20세기 후반 혹은 21세기 초반의 사찰 양식이 이러하다고 할 만한 건물이 지어지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조선시대 사찰의 흉내를 내면서도 콘크리트를 섞어 지은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랄까. 간혹 엄청나게 크게 짓는 절이 있지만 크기만 했지 심미적인 건축이란 생각을 가지기 힘든 절이 대부분이다. 축서사는 이런 의미에서 현대 사찰 건축 양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웅전의 벽화는 불교의 소재를 표현하면서도 사람의 생김새나 옷차림이 한국적이다. 대웅전 앞의 탑은 크면서도 표면에 다양한 그림을 새겨 아름답게 꾸몄다. 절은 지금도 불사 중이다. 불사에 대해 가지는 가치 판단이야 다들 다르겠지만 이왕 지으려면 21세기 초기 절집 양식을 대표할 만한 건축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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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적 인물과 배경의 불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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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교한 부조가 새겨진 탑 |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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