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person 김종규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8-10-16 09:33

안동에 온 후 5년 동안 느끼지 못하다가 올해 문화계 쪽 사람들과 자리를 몇 차례 하면서 느끼게 된 특이한 현상 한 가지가 있다. 권정생 선생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 분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얼굴가득 존경심을 띠면서 말 한마디도 조심을 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안동에 온지 5년을 넘길 동안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한두 번 들어본 것 같긴 하지만 별 관심을 가지지는 못했다. 5년 동안 살면서 알게 된 것이 아동문학가로 ‘몽실언니’가 이분 작품이란 것 정도였다. 2007년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이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아주 청빈하게 사신 분인 모양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안동의 문화계 인사들은 이분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가득 존경심을 띠우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신문에서 이분의 유언장을 보고 유언장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최근 나온 안상학 시인의 ‘아배생각’ 시집에도 이분이 등장했다. 그 시인이 이분의 추모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기에 추모사업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인터넷 자료에서 이분의 작품인 ‘강아지똥’ 일부를 읽어보기도 했다. 조금 감이 잡힐 것 같긴 했다. 앞으로 이분 이야기가 나오면 무례한 말을 하지 말아야지. 그렇지만 이분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니 그냥 조용히 듣고 있으면 본전은 하겠다. 뭐 이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중에 도서관에 갔다가 서가를 둘러보던 중 이 책을 발견했다. 그래, 읽어보자.

우선 선생의 대략적인 일대기를 살펴보자. 선생은 1937년 일본 토쿄의 혼마치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청소부로 일하는 아버지가 주워온 동화책 읽기를 즐겼다. 1944년 미군의 공습으로 살던 동네가 폐허가 되자 쿤마켄(群馬懸)의 츠마코히(妻愛)라는 곳으로 옮겨 살게된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귀국하지 못하고 후지오카(富岡)로 옮겨 살게 된다.

1946년 귀국하지만 큰형과 셋째형은 일본에서 하던 일이 있어 귀국하지 못하고(둘째형은 어머님이 일본 가실 때 데려가지 못하고 한국에 남았다 일찍 사망했다.) 부모님, 누나 둘과 동생만이 귀국한다. 그렇지만 가난으로 가족이 같이 살지 못하고 아버지와 작은 누나는 안동으로, 어머니, 큰누나 동생과 함께 외가인 청송에서 살게 된다. 1947년 아버지가 소작농으로 일하던 안동의 일직으로 가족이 모이게 된다. 1950년 전쟁으로 가족이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다.

1953년 고학으로 중학교 진학을 하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가 1957년까지 재봉틀 상회와 서점의 점원을 하면서 보낸다. 이 곳에서 우정을 나누던 두 친구 중 한 친구는 자살을, 교회에 가라고 권하던 여자 친구는 유흥가로 가는 것을 보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1956년부터 결핵을 앓기 시작한다. 1957년 찾아온 어머니를 따라 안동으로 돌아오지만 병마와 가난으로 고생한다.

196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1965년 동생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넉 달 동안 대구, 김천, 상주, 점촌, 문경, 예천 등지를 떠돌며 거지 생활을 한다. 이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 1966년 동생이 결혼해 분가하고, 방광과 신장을 들어내는 수술을 한다. 이 때부터 소변을 별도의 소변 주머니에 받으며 산다. 1967년 살던 집을 비워야 해서 교회 문간방으로 자리를 거처를 옮겨 종지기 생활을 시작한다. 단편동화 ‘강아지똥’이 제1회 기독교 아동문학상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이를 계기로 글쓰기에 힘을 쏟는다. 1971년 매일신문에 ‘아기양의 그림자 달랑이’가 가작으로 입선한다.

1973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고, 아동문학가 이오덕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1975년 ‘금복이네 자두나무’로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수상한다. 이후 많은 작품들을 발표한다. 1982년 교회 뒤 빌배산 아래 빌뱅이 언덕의 흙집으로 이사해서 남은 생애 동안 이 집에서 산다. 건강 악화를 반복하면서도 많은 글들을 집필한다(작품들은 권정생 선생 추모사업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www.kwonjungsaeng.com). 2005년 정호경 신부의 권유로 유언장을 작성하게 된다. 2007년 5월 70세의 일기로 눈을 감는다.

정호경 신부의 권유로 쓴 유언장에는 자신의 사후를 세 사람에게 부탁한다. "최완택 목사는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은 착하다. 정호경 신부는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에 믿을 만하다. 박연철 변호사는 민주 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 사람이다." 선생은 거의 죽으로 살고, 남들 일주일 반찬값으로 한 달을 살았지만 많은 책과 재산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내가 쓴 책들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인세를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라고 적었다. 유언장을 적은 소회도 적었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들만 남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한다는 것이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일지 모르지만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혹 환생을 한다면 바라는 바도 적었다. "만약에 다시 환생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하지만 환생했을 때도 세상에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중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기자들이 찾아오는 것을 피하던 선생이지만 동네 아이들, 할머니들의 방문은 환영했다. 선생의 집에 찾아갈 때 선물은 집에 있는 쌀을 퍼가거나 집에서 만든 음식을 나눠오는 것은 고맙게 받았지만 돈을 주고 사서 들고 오는 것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에게도 오랜 교분을 나누던 지인들이 있었다. 이오덕 선생이 그렇고, 정호경 신부가 그렇다. 안동의 최윤환 선생은(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분) 자주 방문해서 선생을 보살핀 모양이다. 선생은 때로 유머도 발휘했다. 지인들과의 대화에 그 지인들의 작품으로 대답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다.

2002년 새해에 교분을 나누던 목사님 세 분이 새해인사차 찾았다. 그 방문 인사차 시를 한편 쓴 것이 2002년 3월 ‘민들레교회 이야기’에 실렸다.  

눈 오는 날

김영동이 걸어가다가
꽈당 하고 뒤로 자빠졌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오월 달에 최완택이 산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져 가랑이 찢어졌으면
되게 고소하겠다.

칠월칠석날
이현주 대가리에 불이 붙어
머리카락 다 탈 때까지
소방차가 불 안 꺼주면
돈 만원 내놓겠다.

올해 ‘목’자가 든 직업 가진 몇 사람
헌병대 잡혀가서
곤장 백대 맞는다면
두 시간 반 동안 춤추겠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져
모두 정신차려 거듭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이 시를 본 정호경신부로부터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임오년의 기도 잘 보았습니다. 그날 바쁜 일이 있어 인사를 못 간 저는 빠져있어서 처음에는 다행으로 생각했는데, 이거 괜히 마음 하난 못 받은 것 같아 섭섭합니다.” 정호경 신부는 봉화 명호면 청량산 앞 비나리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신데 겨울에는 외국 서적 번역도 하신다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이분에 대한 이야기는 올해 혹은 지난해 한겨레 신문에 소개된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은퇴 후에 흉내를 내고 싶은 분 중 한 분이다.

선생은 생명을 귀히 여겼다. 집으로 가는 길을 덮은 풀도 베지 못하게 했다. 추운 겨울날 이불 속으로 파고들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드는 쥐를 위해 먹이를 방에다 두기도 했고, 집 벽에 쥐를 위해 옥수수를 걸어두기도 했단다. 새마을운동 때 길을 내기 위해 나무를 자르자 남은 어린 나무를 부여잡고 통곡을 해 주변 사람들이 그 나무를 옮겨 심고 나서야 울음을 멈춘 일도 있다고 한다. 자신은 먹지 못하면서도 기르는 강아지 식사는 열심히 챙겼다.

북한 동포들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1997년 ‘죽을 먹어도 함께 살자’라는 글에서 “하루 한 끼씩 죽을 쑤어 먹더라도 한줌씩의 쌀을 보내 앞으로 몇 개월만 함께 고생을 하자. 비록 얼굴은 마주 보지 못해도 함께 나눠 준 쌀과 밀가루로 우리 한 겨레 한 동포라는 걸 확인하면서 살자. 그래서 이 땅에 다시는 한스러운 역사를 남기지 말자.” 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특히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2007년 3월에 정호경 신부 앞으로 다시 유언장을 쓴다. ‘제발 너무도 아름다운 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제 예금통장은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쪽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미워하고, 그만 싸우고,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그런데 중동과 아프리카 그리고 티베트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선생은 집을 떠나 구걸로 연명하며 떠돌아다닐 때 대구에서 본 영화 포스터를 오래 잊지 못했다고 한다. 열한 살의 불우한 소년 아윤복의 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였다. 나도 그 영화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대구에 실존한 소년의 일기를 기초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당시 우리 가족이 시골에서 대구로 이사한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구의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면서 울었다. 선생은 그 시절에도 대구에서 처절한 세월을 보냈고 그 후 안동에서 치열한 삶을 살고 갔다. 나는 그 시절 대구에 살면서 철이 없었고 그 후 안동에서 어영부영 살고 있다.

권정생 선생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http://www.kwonjungsaeng.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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